마안산 [馬鞍山]높이 : 419m 특징, 볼거리 마안산(馬鞍山)은 동래구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는 도심 산지로 해발 419m인 2개의 종순형 산정으로 이루져 있고, 사면(斜面)은 완만하게 시가지로 뻗어내린다. 마안산이란 산의 모습이 말의 안장을 닮았다는 데서 비롯되며, 동래의 진산인 윤산에서 뻗어내린 산등이의 봉우리로서 옛 동래읍의 주산(主山)에 해당된다. 이 산의 주능선을 따라 동래읍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또한 산정에는 부산지역 3.1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부산 3.1운동 기념탑을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마안산은 일명 대포산과 유방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포산이란 조선후기 이 산에 별포군 200여명이 근무하여 대포를 설치한데서 비롯되었으며, 유방산은 2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의 모양이 여성의 젖가슴을 닮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복천동고분군복천동고분은 사적 제273호('81. 6. 9 지정)로 동래 중심가 북쪽에 반달모양으로 에워싸고 있는 속칭 대포산의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나온 구릉상에 위치하는 부산의 가장 대표적인 고분군이다. 1969년 주택공사로 고분군의 일부가 파괴되어 세상에 알려진 이후, 1969-1995년까지 동아대학교, 부산대학교 박물관과 부산시립박물관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발굴에서 4세기 후반대의 분묘도 꽤 포함되어 있어 4-5세기대 부산의 정치·사회·문화적인 구조를 비교적 치밀하게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고분군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체로 5세기중엽에 종료된 것으로 보이며, 금동관이 나온 동아대학교 발굴조사의 1호분은 규모와 부장품의 질이나 양으로 볼 때 5세기 후엽의 수장급묘로 추정된다. 묘제는 목곽묘와 수혈식석실묘의 2종인데, 대형묘중에는 주곽과 일자형이 되게 목곽형식의 독립된 부곽이 딸린 것이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유구는 모두 130여 기에 달하며, 출토유물은 총 9,000여점이다. 출토유물에는 토기류 2,500여점, 철기류(금속류 포함) 3,200여점, 장신구류 4,010여점, 골각기 등 기타유물 10여점, 이골 5구, 말이빨 등 동물유존체(動物遺存體) 7점 등이 포함되어 있다. 경주지역과 같은 화려한 금은제 유물은 많지 않으나 대신 철제유물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그 중에서도 무구류와 갑주류가 특히 많아 주목된다. 부장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기류는 종류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보물 제598호인 마두식각배, 오리모양토기, 등잔모양토기, 신발모양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부산시에서는 1992년부터 정화사업을 통해 고분군을 사적공원으로 조성하고, 1996년에는 부산시립박물관 복천분관으로 개관하여 복천동고분군 출토유물 뿐만 아니라 인근 가야지역 및 동시대 일본의 유물도 함께 전시함으로써 가야사 및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부산 3.1운동기념탑부산광역시에서는 부산지역에서 일어났던 항일운동 및 3.1운동 당시의 민족기상과 조국애를 드높인 자랑스런 역사적 사실을 기리며, 선열들의 숭고한 뜻과 얼을 받들어 부산지역 항일민족정신을 후대에 계승하고, 또한 항일운동의 역사적 기념물을 세워 민족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키 위해 3.1운동 기념탑을 세우기로 하였다. 3.1운동 기념탑의 건립위치는 일제 때 항일운동이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동래시장 인근인 동래구 명장동 산 93 - 2일대인 마안산 (일명 = 대포산) 정상에 세우기로 하였으며, 탑의 조성기간은 1995년 8월 15일에 착공, 1996년 7월말에 완공하여 8월 15일 광복절 기념일날 제막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3.1운동 기념탑의 조성 이념으로는 부산지역의 3.1독립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과 인간·미래의 조화에 두었고, 조형 요소로 상징탑은 창조하는 미래를 표현하고, 내부 조형탑은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표현, 8쾌 마당은 결집하는 민족정기를 표현, 조경으로는 만남과 화합, 휴식과 산책의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기념탑의 규모는 탑 전체의 높이가 21.6m, 원추형 군상높이는 6m, 좌대의 높이는 29m × 29m = 842㎡(254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탑에는 기미독립선언문과 독립운동 약사, 취지문을 수록하였다. 동래읍성지동래읍성지는 동래구 명륜·복산·명장·안락동 일대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72. 6. 26 지정)로,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축조되어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대표적인 읍성이다. 조선시대 중종 때 편찬되었던『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옛 읍성이 해운포에 있으며 동남은 석축이고 서문은 토석인데 둘레가 4,130척이며, 지금은 퇴폐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설치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일찍이 읍성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읍성이 있었다는 것은『고려사』병조에 현종 때 동래군성을 구축하였다는 기사에서 알 수 있다. 고려말에 들어서면 동래성 구축에 관하여 기본적인 기록이 엿보인다.『동국여지승람(1481)』읍성조에 인용되고 있는 이첨 기사에 의하면, 원구 박무가 1387년(우왕 13) 8월 19일 성축에 착수하여 한 달 이상 걸려서 완공하였다. 당시 읍성의 석축은 둘레가 3,090척, 높이 13척으로 우물이 6개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여러번 왜구의 침입을 겪었고, 또한 침략의 가능성이 점차 짙어진 가운데 동래읍성은 대대적으로 구축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14일에는 동래부사 송상현공을 비롯한 군·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최대격전지이다.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이 고장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과거의 성보다 훨씬 규모가 큰 읍성을 쌓았는데, 그 성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읍성이다. 읍성에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인생문 및 암문이 있고, 각 문의 문루(門樓)로 동문은 지희루(志喜樓), 서문은 심성루(心成樓), 남문은 무루(無憂樓), 암문은 은일루(隱一樓)가 있었다. 또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을 앞의 세병문(洗兵門)과 뒤의 주조문(朱鳥門)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서문과 암문 및 북문에는 성문의 보호를 위해 옹성(甕城)을 부설하였고, 장대, 망루 및 15개소의 보루(堡樓)를 갖추고 있었다. 일제시기 때 시가지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평지의 성벽은 철거되었으며,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성벽도 민가가 점유하여 마안산을 중심으로 한 산지에만 성곽의 형태가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