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왕산높이 : 307m 특징, 볼거리 한없이 쏟아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모른다. 야심한 밤 운전이 쉽지 않다. 옛 생각을 더듬어 한적한 해미읍성 앞에 있는 모텔에서 하룻밤을 유한다. 한때 당진 근처에서 6개월 정도를 유하던 때가 있었다. 손만 뻗치면 사과를 딸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반농반어를 하는 마을 이었다. 당시 주변을 샅샅이 뒤져 여행을 했었다. 그 이후로도 개심사와 해미읍성 정도는 들렀지만 마애삼존불과 용현계곡을 찾은 지는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다. 이른 아침, 다행이 비는 그쳤다. 관광객 하나 없는 해미읍성에 발을 내딛는다. 초록빛과 들풀로 물든 넓은 성터.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사람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나무에도 푸른 잎이 우거져 있다. 해미읍성은 1491년 성종 때 완성된 석성인데 500년 풍파를 견디고도 성곽과 문루가 현재까지 완벽하게 남아있어 조선시대 축성된 읍성 중 원형 보존이 전국에 있는 성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성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른 아침 산책을 나온 아주머니 외에는 썰렁하다. 이내 차를 돌려 개심사로 향한다. 개심사를 굳이 들를 이유는 찾지 못했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잠시 절집을 찾아도 좋을 듯하다. 개심사 들어가는 길에 운 좋게 서산목장에 풀을 뜯고 있는 소떼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여러번 왔던 곳이지만 한번도 방목된 소를 본적이 없었다. 소떼와 백로가 한데 어우러져 아침밥을 먹기에 여념이 없다. 개심사는 상왕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작지만 아담한 사찰이다. 울창한 홍송으로 뒤덮히고 초록빛으로 물든 울창한 숲에서 풍겨내는 청신한 기운이 하루의 시작을 상쾌하게 열어주는 듯하다. 개심사가 좋은 점은 늘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허대사가 머물렀다는 요사채 뒤로 난 산신각에 눈도장을 찍고 이내 서산 마애불로 향한다. 서산 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을 찾아가는 길에 만나는 용현계곡. 계곡 자체만으로는 큰 점수를 줄 수 없지만 바다가 인접해 있는 이 지역을 감안한다면 감로수와 같은 존재다. 용현계곡은 가야산 석문봉에 깃대를 올리고 하나는 옥양봉과 수정봉으로 달리고 또 다른 하나는 상왕산으로 갈라진 틈바구니에 계류가 흘러 생긴 골짜기로 무려 4km에 이른다. 다리를 건너고 계단을 따라 오르는 길에도 숲이 우거져 있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백제의 미소’라고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가운데 부처님은 둥근얼굴에 눈을 한껏 크게 뜨고 두툼한 입술로 벙글벙글 웃고 있다. 누구나 보아도 불상의 미소에 절로 입이 벌어진다. 미소가 편안하다. 이곳은 태안 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지름길 위에 있는데, 길은 옛부터 중국과 교통하던 옛길이었다. 마애불이 있는 지점은 600년 당시에는 중국 불교 문화에 자극을 받아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고 한다. 이곳을 벗어나 계곡길을 따라 올라간다. 보원사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약 1km의 거리에 보원사지(사적 제 316호)가 있다. 육안으로는 특별히 변한 것이 없다. 단지 예전에는 보원사지에서 길이 끝났다는 것만 기억된다. 무성이 풀숲이 되어 버린 절터. 이곳은 고려초에 창건한 사찰로서 고승 법인국사가 수도했다 한다. 보원사지내에 적조(보물 제102호), 당간지주(보물 103호), 5층석탑(보물 104호), 법인국사보승탑(보물 105호), 법인국사보승탑비(보물 106) 등이 있다. 보원사지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던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서 석탑상, 하대 기단의 이완이 심하고 탑신이 동남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석탑보존을 위해 보수공사를 시행하게 됐다. 개심사 [開心寺]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솔가한 한남금북정맥은 안성의 칠현산에서 다시 두 갈래로 나눠집니다.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이 바로 그것인데, 금북정맥이 서해바다에 몸을 부리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르는 상왕산(307m) 남쪽 기슭에 안긴 절이 개심사이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정표 중에 갈래머리 땋은 예쁜 소녀를 연상시키는 해미(海美)라는 이름을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고속도로를 버리고 해미읍에서 당진쪽으로 5km쯤 달리다 신창리에서 우회전해 5리쯤 더 가면, 홀연히 길은 사라지고 산문이 열립니다. 험한 산 소나무 골짜기 다 쓰러져 가는 암자 하나 산허리에 걸린 길은 실낱 같은데 안개비 속에 지워질 듯 지워질 듯. (석지현 엮음, 선시감상사전 375쪽, 민족사) 중국 원나라 때의 선사인 중묵 스님이 지은 ‘옛 절(古寺)’이라는 시의 풍정을 떠올리게 할 만큼 호젓한 분위기입니다. 우리나라 유명 사찰 아랫마을은 어디고 유원지 냄새가 물씬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습니다. 열병처럼 지나간 답사 열기 때문에 개심사도 이제는 널리 알려진 절이 되었지만 아직 번잡의 때는 묻지 않았습니다. 산문에는 그 흔한 일주문도 없습니다. 다듬지 않은 자그마한 표석이 그것을 대신합니다. 왼쪽에는 세심동(洗心洞), 오른쪽에는 개심사 입구 (開心寺 入口)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마음 씻는 골짜기’의 ‘마음 여는 절’로 드는 문이라는 말이겠지요. 하지만 애써 마음을 씻고 열고 할 것이 없습니다. 길 따라 몸을 맡기면 절로 그리 됩니다. 절로 드는 길은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솔숲 사이로 난 돌계단 길이고, 하나는 찻길입니다.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도 몸이 돌계단 숲길로 발을 옮겨 놓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의 힘입니다. 아무리 문명에 길들여진 몸이라 할지라도, 자연 앞에서는 원시성을 회복합니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부처의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아는 일이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결코 두꺼운 경전이 필요치 않습니다. 자연의 생명력에 공명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듣는 일이자 산천초목이 다 부처임을 아는 길입니다. 800m 남짓한 개심사의 솔숲 돌계단 길은 몇 백 리 다리품에는 과분한 즐거움을 안겨 줍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을 일입니다. 뒤돌아보면 발자국마다에 녹음이 고여 있는 듯하고, 올려다보면 솔잎에 걸린 구름이 꽃인 양 합니다. 가람은 가로로 길쭉한 연못으로 시작됩니다. 상왕산의 형세가 코끼리 같은데 그 코끼리가 마실 물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못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경지(鏡池)라 합니다.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뜻이겠지요. 이미 세심동(洗心洞)을 거치며 마음을 씻은 터이므로 거리낌 없이 비춰 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봄이면 떨어진 벚꽃 잎이 한 번 더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배롱나무 꽃 그림자가 수련과 조화를 이루는 연못입니다. 연못 가운데에는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최근에 부러질 위험이 있어 치웠다고 합니다. 스님들은 무리지어 움직일 때도 외줄로 걷습니다. 그것을 안행(雁行)이라 합니다. 기러기가 정연하게 한 줄을 이루어 하늘을 나는 모습에 빗댄 것입니다. 인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함께 가더라도 결국은 혼자입니다. 죽음만큼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연못을 지나면 1300년 고격을 고이 간직한 전각들이 펼쳐집니다. 서해쪽으로 열린 공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범종각을 지나 안양루를 비껴 오르면 심검당과 무량수각이 대웅보전을 떠받치는 형상으로 자리 잡고 있고, 가운데에는 5층석탑이 서 있습니다. 무량수각 오른쪽으로는 요사와 명부전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개심사 금당인 대웅보전은 보물 제143호로, 다포계와 주심포계 양식을 함께 갖춘 건물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전각들 중에서는 휘어진 기둥을 그대로 살려 쓴 심검당이 단연 돋보입니다. 우리나라 사찰 곳곳에 이런 기둥은 흔합니다. 그런데 유독 개심사의 심검당에 더 눈길이 가는 건 무슨 까닭일까요. 아마도 처마를 맞댈 듯 가까이에 있는 대웅전과 달리 단청도 하지 않은 검박함이 대범과 비범으로 느껴지는 탓일 겁니다. 크고 잘난 것만 추구하는 세태에 초연한 그 모습만으로도 미덥고 고맙습니다. 심검당의 휘어진 기둥이 진정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인간이 어떻게 자연에 다가가야 하는지에 있을 것입니다. 흔히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말하지만, 저절로 된 것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과의 조화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좋은 것도 없는 것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소곳이 기대는 것일 겁니다. 개심사 심검당의 휘어진 기둥에서, 참으로 곱게 자연에 기댄, 겸손의 몸짓으로 자연에 스며든 인간의 성정을 봅니다. 목재의 귀함과 같은 기능적인 이유나, 운치를 곁들이기 위한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렇게 메마른 시각으로 이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얘기가 샛길로 빠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애써 구운 도자기를 가마에서 꺼내자 말자 마치 조물주인 양 살펴보고는 깨 버리는 것을 볼 때마다 오만이나 위선 같은 걸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문외한으로서 욕먹을 얘기가 되겠지만, 못 생기면 못 생긴 대로 나름의 구실이 있을 텐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개심사의 창건은 654년(백제 의자왕 14년)에 혜감 국사가 개원사(開元寺)라는 이름으로 산문을 열면서부터입니다. 이후 14세기 초반에 쇠락했다가 1350년(충정왕 2년)에 처능(處能) 스님이 중창하면서 개심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또한 고려 후기의 진정(眞靜)이 지은 호산록(湖山錄)에는 ‘폐사가 되어 수풀이 무성하나 절 뒤편에 새로 지은 세 칸짜리 부도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475년(성종 6년) 충청 절도사 김서형(金瑞衡)이 사냥하다가 산불을 내서 절이 탔으나, 이 해에 다시 중창했다고 합니다. 그 뒤 1740년(영조 16년)에 중수하였고, 1955년 전면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릅니다. 개심사의 명부전은 절 규모에 비해 유난히 큽니다. 마음 씻는 골짜기에 자리한 절인 만큼, 염라대왕 앞에서 달아볼 죄의 무게를 미리 일러 주어 조금이라도 덜어내게 하려는 배려일 것이라고 제멋대로 해석을 해 봅니다. 명부전에는 죄의 유무를 가리는 염라대왕을 비롯한 지옥을 다스리는 열 명의 왕이 모셔져 있고, 사이사이에 동자상이 있습니다. 아이들처럼 무구한 마음으로 살면 지옥의 고통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가르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명부전에서 조금 더 발길을 옮기면 산신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멀리 서해로 강물처럼 흐르는 산줄기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산에서 산바라기를 하는 느낌이 각별합니다. 마음 살피는 일도 이와 같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산, 이 절 -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교통 안내 운산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647번 지방도로를 따라 해미 쪽으로 1.5km 가다 보면 길 왼쪽에 오일뱅크 가야주유소가 있고 주유소 앞에 덕산으로 가는 618번 지방도로가 있다(서산마애불 표지판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4.2km 가면 다리를 건너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가는 도중 터널도 통과하고 왼쪽에 고풍저수지도 보인다) 오른쪽 길을 따라 700m 가면 작은 가게와 함께 마애삼존불로 오르는 입구가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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